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롬9:19-29 진노의 그릇과 긍휼의 그릇
이종석   2018-09-19 1310

롬 9:19-29 진노의 그릇과 긍휼의 그릇
1. 하나님은 만물을 뜻대로 주장하십니다(19-21)
롬 9:1-18절에서 이스라엘의 역사가 하나님의 선택으로 된 역사이며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서 그 백성을 구원하셨음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의 자녀가 아니라 오직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네 씨라 불리리라’ 하신 말씀과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신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이 왜 누구는 선택하시고 누구는 버리시는지 하는 의문 속에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주권에 순종하지 못하고 하나님에게 허물이 있다는 뜻으로 대적함으로써 불순종하는 모습에 ‘이 사람아 네가 누구이기에 감히 하나님께 반문하느냐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함으로써 피조물인 인간이 이럴 수 없음을 토기장이의 비유를 통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구원의 기회를 누구에게나 똑같이 부여해야지, 왜 어떤 사람은 버리시는지 하는 의문은 예레미야에게도 있었습니다. 왜 하나님을 믿지 않는 바벨론은 강해지며 선민 이스라엘은 전쟁의 포로가 되느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대답으로 토기장이 집에 가보라고 하였습니다. 가서 보니 토기장이는 자기 마음대로 그릇을 만들기도 하며 부수기도 하며 큰 것 작은 것을 멋대로 빗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사실을 통하여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설명하셨습니다.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어리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없느냐’ 하는 말씀은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를 말씀합니다. '아담'이란 말은 '아다마'(진흙)이란 말에서 나왔습니다. 진흙은 흙을 물에 섞은 것입니다. 마른 흙만 가지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고운 흙이 물에 개이고 그것이 부드럽고 고분고분하게 됨으로서 토기장이의 손에 의하여 좋은 작품들이 나오게 됩니다. 흙에 물을 부어 진흙이 되게 한다는 것은 보잘것없고 무가치한 것에 하나님의 능력이신 물이 부어짐으로 우리에게 생명이 부여된다는 것입니다(창 2:7). 토기장이는 자기의 손에 쥐어진 각 진흙 덩어리에 대해서 하나의 구체적인 계획을 갖는 것 같이 하나님은 우리들 각자의 삶에 대하여 계획 또는 목적을 갖고 계십니다. 하지만 모든 사람의 삶이 똑같은 목적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토기장이가 수많은 형태로 그릇을 만들듯이 어떤 사람은 이러한 역할을, 다른 사람은 저러한 역할을 하도록 하나님은 만드십니다. 어떤 사람은 남자로 어떤 사람은 여자로, 이 사람에게는 이 재능을 주시고 저 사람에게는 다른 재능을 주십니다(달란트 비유).
우리는 피조물입니다. 지음을 받은 자입니다. 하나님은 창조주 주인이시며 인생은 그 피조물입니다. 사람이 아무리 잘나고, 지식이 있고, 재물이 있고, 힘과 권력이 있고, 아름답고 잘났다고 해도, 자기 스스로 세상에 온 자 없습니다. 모두 하나님의 뜻과 섭리 가운데 보내시니 왔습니다. 보냄을 받은 인간이 하나님께 왈가왈부할 수 없습니다. 지음 받은 물건이 자기를 빚은 자에 대하여 이르기를 그가 총명이 있다, 없다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서 있는 위치에서 내 분수와 사명을 바로 알아 충성을 다하고 최선을 다함이 우리 인생의 본분이 됩니다. 진흙은 진흙으로서 자기의 본분을 다해야 합니다.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내가 맡은 직분에 충성을 다해야 합니다.
순간마다, 시간마다, 매일, 매주간, 하나님을 가까이하고 주님과 동행 하며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며 순종하도록 합시다.
2. 진노의 그릇과 긍휼의 그릇(22-23)
하나님은 토기장이와 같이 진흙으로 인간을 지으시면서 목적을 가지시고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하십니다. 하지만 인간이 타락하여 에덴의 동산에서 추방되고 사탄의 지배를 받지만, 인간 속에 믿음의 씨를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고 확장하시기 위하여 유대인을 택하여 하나님의 역사를 드러내시려 하지만 불의한 인간은 온전히 순종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이런 인간은 다스릴 때 사랑으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공의로 다스리며 하나님의 역사를 드러내시기 위하여 재앙이나 징계를 하시기도 하시고, 불의 한 자를 급히 멸절시키지 아니하시고 그대로 놔두어 하나님의 능력을 알게 하고자 오래 참거나 용서하기도 하십니다. 그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의 부요함을 알게 하도록 하기 위하여 긍휼의 그릇을 준비하시는데 이는 메시아를 통한 구원을 말합니다. 곧 모든 인류를 죄의 타락으로부터 회복시키기 위해서 가죽옷을 준비하시고 예수님을 통하여 인류를 구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유대인을 통하여 긍휼의 그릇으로서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기를 원했지만 불순종하여 진노의 그릇이 됩니다. 하지만 이방인은 진노의 그릇이었지만 믿음을 통하여 긍휼의 그릇이 됩니다. 진노의 그릇에 대해 오래 참으시다가 그 진노를 거두셨습니다. 그리고 관용을 베푸셨습니다. 그리고 자기 백성이 아닌 우리를 내 백성이라 부르셨습니다. 사랑하지 않았던 우리를 사랑하는 자라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긍휼의 그릇이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그들이 아무리 수가 많을지라도 오직 남은 자만 구원을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똑똑한 인간의 사고는 헷갈립니다. 하지만 인간 편에서 볼 때는 헷갈리지만 하나님의 오묘하신 섭리를 통하여 볼 때는, 우리는 이해할 수 없지만, 하나님의 뜻 가운데 이루어진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나의 고정관념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려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도구입니다. 우리는 주인이 아니라 종입니다. 그래서 나의 관점에서 말씀을 보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통하여 자신을 끊임없이 돌아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로마서를 묵상하고 있습니다. 왜 1장에서 소위 이신칭의로 끝나야 할 말씀이 1장 19절부터 3장 20절까지 죄에 대한 말씀을 하십니까. 하나님은 준비하셨지만 인간의 준비가 안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3장 21절부터 5장까지 칭의와 거룩함과 화목에 대한 말씀으로 로마서가 끝나야 하는데 6장에서 다시금 세례에 대한 말씀으로 시작을 합니다. 이는 칭의를 통하여 거룩함으로 하나님과 화목된 자의 삶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날마다 세례 받은 자로서 죽는 삶을 살도록 하신 말씀입니다. 그래서 7장에서 내가 힘써 살았는데 결과는 무엇입니까? 탄식입니다. 절망입니다. 나의 의의 결과입니다. 그래서 8장에서 말합니다. ‘그래 네 힘으로 안 되지’ 이제는 하나님의 주시는 힘으로 하라고 성령의 이끌림을 받기 위한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영화까지 확실히 하나님께서 보장해주시는 두려워 말고 놀라지 말고 담대히 살도록 말씀함으로써 교리 편이 끝납니다. 그런데 롬 9장이 있습니다. 성도는 칭의와 성화 그리고 영화로서 온전히 보장된 우리에게 또 무슨 말씀이 필요할까요? 이는 이스라엘 곧 유대인을 빗대어 그래 너는 하나님의 자녀지. 세례 받은 자지. 너는 완전히 이신칭의로서 구원받은 자이고, 하나님이 네 생명 다하도록 지켜주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존재이지만 너 이스라엘 백성을 돌아보라 하면서 9장부터 11장까지 이스라엘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 대한 말씀으로 자신을 점검하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도구입니다. 그리고 신앙은 진행입니다. 나는 과연 진노의 그릇이 긍휼의 그릇이 되어 하나님의 도구로써 바르게 쓰임 받고 있는지를 점검해야 합니다. 이를 위하여 이미 구원의 역사 시점에서 칭의로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하나님의 나라가 시작되어 천국을 삶을 누리고 있지만 진정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 가운데 평강의 삶을 누리며 기쁨을 삶을 살고 있는지를 점검해야 합니다.
부여된 천국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그래서 영화를 바라보고 성화 된 삶을 살아야 할 자신이 지금도 변화 받는 삶을 살고 있는지를 점검하며 변함없이 주어진 사명에 충성하는 삶을 살도록 합시다.
3. 남은 자를 통하여 일하시는 하나님(24-29)
바울은 토기장이의 비유를 통하여 이제는 ‘이 그릇은 우리니 곧 유대인 중에서뿐 아니라 이방인 중에서도 부르신 자니라’(24) 고 말씀함으로 이제 이방인도 하나님께서 선택하여 하나님의 그릇으로 사용되고 있음을 말씀합니다. 이를 증명하기 위하여 호세아서에서 말씀을 인용합니다. 곧 이방인에 대한 하나님의 선택에는 차별이 없음을 말합니다(호 2:23, 1:10). 또한 사 10:22을 본문에 인용하면서 남은 자의 구원을 말씀합니다. 곧 '이스라엘 너희가 바다의 모래 같이 많다고 해도 오직 남은 자만 구원을 얻을 것이다'는 말씀입니다. 이는 남은 자에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남은 자만 구원을 시키는 하나님을 말씀합니다. 남은 자 역시 그들의 신앙이 좋아서 남은 자로 작정된 것이 아니라 그들 안에 하나님이 씨를 남겨 두셨기 때문입니다(29).
9장을 보면 사도 바울이 계속 강조하고 있는 것은 '씨'가 따로 있다는 것입니다. 6-8절에서도 사도 바울은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고,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 자녀가 아니라 오직 이삭으로부터 난자라야 네 씨라 칭한다는 말을 합니다. 본 장에서 바울은 이 사상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만 국한하지 아니하고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 문제와 접목해 세계로 확대하여 해석하고 있습니다. 즉 모든 민족, 그리고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적용합니다. 하나님께서 남은 자의 씨를 남겨 주셨습니다.
남은 자가 바울에게는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롬 11:5) 예수 안에 거하는 모든 이방인을 뜻합니다. 바울은 로마서 9-11장에서 구약의 구절을 인용하면서 육신적 이스라엘 백성 중 주를 믿는 자만이 구원받았다고 말하고 또 믿음을 지닌 이방인들도 새 신앙 공동체에 접붙여졌다고 가르침으로 '남은 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소수의 유대인만이 아니라,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롬 11:5) 예수 안에 거하는 모든 이방인입니다.
남은 자는 그리스도의 은혜를 입는 자로서 하나님께서 남겨 주신 씨가 있는 자입니다. 만약 씨가 없다면 그가 아무리 신앙이 좋아 보인 것 같다고 해도 그는 소돔이고 고모라에 지나지 않습니다. 남은 자는 '하나님이 남겨 두신 씨로 인해서 살았다'는 것을 아는 자입니다. '나는 하나님이 남겨 두신 씨가 아니면 소돔과 고모라처럼 멸망할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철저히 자각하고 살아가는 사람이 바로 남은 자인 것입니다. 또한 남은 자는 최후의 승리자를 의미합니다. 이 세계 모든 민족과 백성 중에 하나님의 백성 된 우리들을 일단 심판에서 제외되는 '남은 자'입니다. 그러나 교회에 출석하여 예배의 회중에 들었다고 하여 모두 '남은 자'는 아닙니다. 이 땅 위에서 맡겨진 사명과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기 위해 갖은 환난 가운데에서도 이를 극복하여 최후의 승리를 쟁취한 자가 바로 진정한 '남은 자'입니다(빌 2:12).
남은 자에게는 고난이 따르기 마련입니다. 일신의 쾌락을 추구할 여유가 없습니다. 노아와 그의 가족이 그랬으며 엘리야 시대에 7,000명이 또 그러하였습니다. 어떠한 사탄의 궤계에도 미혹되지 않고 믿음을 지켜 가는 자들, 그들이 진정한 의미의 '남은 자'인 것입니다. 진실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만을 의지하기 때문에 미래에 대한 희망을 품고 살아갑니다. 결코 운명론적인 삶을 살지 않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고난 속에서 감사하며 인내합니다(롬 5:3, 4).
하나님은 우리에게 소망을 주십니다. 그래서 과거에 연연한 삶도 아니요,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며 살아가지만, 현실을 부정하거나 역경에 좌절하지 않고 결단하며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고 확장하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는 삶입니다.
하나님께서 부여해 주신 씨를 통하여 생명력 있는 삶을 살아가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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