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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24일(화) 말씀묵상(시편 106편 13~31절) |
darling069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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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4-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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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4월 24일(화) 말씀묵상
본문 : 시편 106편 13~31절
(13) 그러나 그들은, 어느새 주님이 하신 일들을 잊어버리고, 주님의 가르침을 기다리지 않았습니다.
(14) 그들은 광야에서 욕심을 크게 내었고 사막에서는 하나님을 시험하기까지 하였습니다.
(15) 그래서 주님께서는 그들이 요구한 것을 주셨지만, 그 영혼을 파리하게 하셨습니다.
(16) 그들은 또한, 진 한가운데서도 모세를 질투하고, 주님의 거룩한 자 아론을 시기하였습니다.
(17) 마침내 땅이 입을 벌려 다단을 삼키고, 아비람의 무리를 덮어 버렸습니다.
(18) 불이 그들의 무리를 불사르고, 불꽃이 악인들을 삼켜 버렸습니다.
(19) 그들은 호렙에서 송아지 우상을 만들고, 부어 만든 우상을 보고 절을 하였습니다.
(20) 그들은 자기들의 영광이 되신 분을 풀을 먹는 소의 형상과 바꾸어 버렸습니다.
(21) 그들은 또한, 이집트에서 큰 일을 이룩하신, 자기들의 구원자 하나님을 잊어버렸습니다.
(22) 함의 땅에서 행하신 놀라운 이적들도, 홍해에서 행하신 두려운 일들도, 그들은 모두 잊어버렸습니다.
(23) 그래서 주님께서는, 그들을 멸망시키겠다고 선언하셨으나, 주님께서 택하신 모세가 감히 주님 앞에 나아가 그 갈라진 틈에 서서 파멸의 분노를 거두어들이시게 하였습니다.
(24) 그들은 주님께서 주신 그 낙토를 천하게 여기고, 주님의 약속을 믿지 않았습니다.
(25) 그들은 장막에서 불평만 하면서,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26) 그래서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손을 들어 맹세하시고, 그들을 광야에서 쓰러지게 하셨으며,
(27) 그 자손을 뭇 나라 앞에서 거꾸러지게 하시고, 이 나라 저 나라로 흩어지게 하셨습니다.
(28) 그들은 또 바알브올과 짝하고, 죽은 자에게 바친 제사음식을 먹었습니다.
(29) 이러한 행실로, 그들은 하나님을 격노하게 하여서, 재앙이 그들에게 들이닥쳤습니다.
(30) 그 때에 비느하스가 일어나서 심판을 집행하니, 재앙이 그쳤습니다.
(31) 이 일은 대대로 길이길이 비느하스의 의로 인정되었습니다.
1. 본문 이해
- 엄청난 홍해 사건을 경험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그들은 하나님이 행하신 일들을 모두 잊어버리고 말았다(13절). 주님의 가르침을 기다리지도 않았다(13절). 그들은 탐욕이 이끄는 본능적 욕구를 따라 살았다(14절). 없으면 구하면 될 일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불평과 원망을 입에 달고 살았다. 물이 없다고 원망하고, 만나를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고기가 없다고 불평하고 원망함으로 하나님을 시험했다. 그러한 그들의 요구를 다 들어 응답해 주셨다(15절). 그렇지만 그러한 죄로 인하여 하나님의 징벌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민 11장).
- 조상들의 악행은 끝이 없다. 하나님이 세우신 모세와 아론의 지도력을 시기하여 고라와 다단과 아비람과 온이 당을 지어서 대적한 것이다(민 16장). 이 일로 인하여 하나님이 땅을 갈라 그 당들을 모두 삼키게 하시고 불태워 죽이셨다(17~18절).
- 또한 그들은 모세가 십계명을 받으러 산에 올라간 사이에 금송아지를 만들어 숭배했다(19절). 놀라운 이적을 행하신 하나님을 일개 짐승의 형상으로 바꾸어버린 것이다(20절, 출 32장). 이는 구원자 하나님을 잊어버린 결과라고 시인은 고백한다(21절).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을 모두 멸절시키려고 했다(출 32:10). 이때 모세가 목숨을 걸고 중보 함으로 하나님이 그 진노를 거두신 적도 있었다(23절, 출 32:11~14).
- 그것만이 아니었다. 그들은 가데스 바네아에서 열명의 정탐꾼의 보고를 받고 모세와 하나님을 대적했다(민 14장). 하나님이 분명히 가나안 땅을 약속으로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그 땅을 혹평했고, 주님의 약속도 믿지 않았다(24절). 메뚜기 콤플렉스에 걸려서 불순종한 것이다(25절). 이에 하나님은 그들을 광야로 돌려보내시고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한 출애굽 일 세대들을 사십 년간 광야에서 유리하게 하시고 그들을 모두 광야에서 죽게 만드셨다(26~27절).
- 모압 왕 발락이 발람의 조언을 받아 이스라엘 백성들을 미혹했다(민 25장). 미인계를 써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바알브올의 제사에 초대하였다(28절). 거기서 그들은 함께 우상에게 제사하고, 우상제물을 먹고 마시면서 음행했다. 이로 인하여 하나님이 보내신 염병으로 이만 사천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죽고 말았다(29절, 민 25:9). 이 와중에 미디안 족장의 딸 고스비와 음행하던 스므온 지파 족장 시므리를 비느하스가 현장에서 죽임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가 그치게 되었던 적도 있다(30~31절).
2. 나의 묵상과 적용
- 끊임없는 불평과 원망이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의 트레이드마크처럼 느껴진다. 시인은 그러한 부끄러운 과거 선조들의 역사를 솔직하고 고백하고 있다. 왜냐하면 선조들의 죄악이 지금도 여전히 진행 중이기 때문이었다. 불평과 원망은 신앙생활에 있어서 암과 같은 존재이다. 불평과 원망은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할 때 나타나는 현상이며, 탐욕의 노예가 될 때 나타나는 현상이기도 하다. 불평하고 원망할 수밖에 없는 상황 때문이 아니라는 말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라. 그들의 광야생활은 기적의 연속이었다. 그들은 농사 한 번 짓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광야 사십 년 동안 하나님이 그들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해 주셨다.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뜨거운 햇빛을 가려주시고, 밤에는 불기둥으로 온돌을 만들어주셨다. 하늘의 만나를 먹여주셨고, 질리도록 고기도 먹게 하셨다. 목마를 때에는 무공해 물도 제공해 주셨다. 모든 것을 채워주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틈만 나면 불평이었고 원망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불평과 원망은 외적인 요인으로 인하여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목회의 현장에서, 힘들고 어려운 문제를 직면할 때 나도 하나님 앞에 불평하고 원망하기 일쑤였다. 왜 내가 이러한 억울한 일들을 당해야 하느냐고 항변하기도 했다. 그때는 그게 정당한 항변이었다고 생각했다. 정말 어리석기 그지없었다. 불평과 원망은 결국 나의 내면 상태의 결과였던 것이다. 내 마음이 하나님의 은혜로 충만하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충만할 때에는 지옥 같은 환경 속에서도 감사로 충만한 인생을 살았지만, 내 마음이 마른 사막 같이 되고 하나님의 은혜를 다 잊어버린 채 탐욕을 따라 살 때엔 천국과 같은 환경 속에서도 불평하고 원망하는 인생을 살았던 것을 솔직하게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사람에 대한 불평과 원망도 동일하다. 그 사람에 대한 사랑이 식어지면 모든 것이 불만이고 싫어지고 불평과 원망이 넘치게 된다. 그렇지만 사랑하는 마음으로 충만하게 되면 상대가 어떠한 행동을 해도 용납하게 되고 감사하게 되고 칭찬과 격려가 넘치게 된다. 결국 내 마음이 문제인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도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은혜를 기억하며 하루를 감사로 충만하게 살아가기를 원한다. ‘모든 일에 감사’하고 ‘매 순간 감사’하며 ‘무조건 감사’하는 그러한 하루가 되기를 위하여 기도한다.
- 사람마다 각자 하나님이 정해주신 분복이 있고 역할이 있는 법이다. 그러므로 비교해서는 안 된다. 무엇이든 비교하는 순간 사단이 틈을 타게 된다. 비교하는 버릇을 가지게 되면 건강한 영혼을 소유하기 어렵다. 그러므로 비교는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바리새인은 세리와 자신을 비교함으로써 영적 우월감을 가졌다. 고라와 그 일당은 모세와 비교함으로써 모세의 영적 권위에 도전하는 시기와 질투의 화신이 되고 말았다. 나도 젊은 시절엔, 동료 목회자들을 비교할 때가 많았다. “왜 똑같이 충성하는데 저 목회자는 저렇게 승승장구하는데 나는 맨날 이 모양이지?” “왜 저 목회자는 정도를 걷지 못하는데도 교회가 계속 부흥하고 나는 정도를 걷기 위해 몸부림치는데도 이렇게 초라하기만 하지?” 이러한 등등의 생각들로 인하여 마음 상해 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래서 교회가 얼마나 부흥했다느니, 교회 건물을 얼마 주고 구입했다느니, 몇 명이 세례를 받았다느니 하는 그런 이야기들을 들으면 진심으로 축복해주기보다 이상스레 마음이 불편해질 때가 많았다. ‘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딱 그러한 못된 심뽀였던 것이다. 더 큰 문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나의 상태에 대해서 큰 문제의식을 별로 가지고 있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말씀을 묵상하는 가운데, 요한복음 21장에서 하나님에게 크게 야단을 맞았다. 베드로가 예수님의 품에 의지해 있던 자를 보고,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사옵나이까?”(요 21:21)라고 물었을 때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요 21:22). 하나님께서 이 말씀으로 그 동안 비교하여 시기하고 질투하던 나의 나쁜 고질적 사고에 대해 칼을 들이대신 것이다. 그날 나는 이 말씀 앞에 완전히 깨어지고 말았다. 비교하는 것이 얼마나 큰 죄악이며, 동시에 자신의 영혼을 병들게 하는 것인지를 철저하게 깨닫게 되었다. 그 이후로 비로소 모든 비교에서 자유 하는 목회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사람마다 하나님이 주신 권세가 있고, 분복이 있고, 역할과 책임들이 있는 법이다. 비교할 여력이 있으면 차라리 그것으로 자신에게 맡겨주신 일에 조금이라도 더 충성하는 편이 훨씬 낫다고 나는 생각한다. 가진 것, 누리는 것 어느 것도 비교할 필요가 없다. 하나님이 보시는 것은 다섯 달란트냐 두 달란트냐 한 달란트냐 하는 것이 아니다. 그 달란트에 맞게 얼마나 충성하였느냐를 보실 뿐이다. 재산을 비교하고, 학벌을 비교하고, 외모를 비교하고, 누리고 사는 모든 것들을 비교하게 만드는 것은 사단의 수작이다. 거기에 놀아나서는 안 된다. ‘자족’의 은혜는 비교하지 않는 자들에게 주시는 주님의 선물이다. 그래서 아멘, 또 아멘이다.
- 가데스 바네아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실패한 근본 원인인 하나님에 대한 불신 때문이었음을 본다.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부족하게 되면 나타나는 증세들이 많이 있는데 대표적인 것이, 하나님의 말씀보다 사람의 말에 더 귀를 기울이게 된다는 점이다. 수많은 이적을 보여주신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지만 그들은 열 명의 정탐꾼의 말에 더 귀를 기울였다. 그래서 사십 년의 광야생활을 경험하게 된 것이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히 11:1)라고 성경은 말씀한다.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부족하게 될 때 나타나는 또 하나의 증세는, 현실의 문제에 대한 과도한 두려움이다. 그래서 그들은 메뚜기 콤플렉스에 걸리고 말았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는 것들에 대한 염려와 걱정은 환경적 요인이 아니라 결국 하나님에 대한 신뢰의 부족에서 오는 것들이라는 말이다. 가데스 바네아의 실패를 답습하지 않기 위해서는, 더 나은 환경, 더 좋은 기회들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신뢰의 폭을 더 넓히고 신뢰의 깊이를 더 깊게 만드는 것이다. 일본의 진주만 기습이 있은 후에 미 국민들이 “Remember Pearl Harbour”라는 구호를 외치고 가슴에 새겼듯이, “가데스 바네아를 잊지 말라”는 구호를 가슴 깊이 새기는 목회가 되기를 위하여 기도한다.
- 음행의 문제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고질적인 문제인 것 같다. 이것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는다. 매 순간 영적 긴장감을 가지고 조심하지 않으면 언제든 무너질 수 있는 위험한 요소이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라고 하는 칭찬과 별명을 가지고 있던 다윗을 무너뜨렸던 것도 바로 이것이었다. 요즘 기라성 같은 목회자들의 부끄러운 민낯이 드러나는 것도 대부분 이런 문제이다. 나라고 여기에서 자유할 수 있을까? 어느 성도분이 나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목사님의 외모는 천상 목사님이십니다.” 목사가 너무 잘 생기면 시험들 일도 많을 텐데 그럴 걱정 없는 외모이니 목사로서 적합한 외모라는 것이다. 칭찬인지 욕인지?(^^) 하지만 나도 연약한 인간에 불과하다. 그러기에 나 역시 이러한 문제에서 결코 자만할 수도 자신할 수 없고 자유 할 수도 없다.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 10:12)는 이 말씀을 늘 가슴에 새기고 항상 영적으로 깨어서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될 뿐이다. 하나님의 보호의 은혜가 이 종에게 충만하게 임하기를 위하여 기도한다.